한시

『송서(宋書)·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남조 양(梁) 심약(沈約·441~513)

노년의 인생 2024. 9. 10. 14:37

『송서(宋書)·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남조 양(梁) 심약(沈約·441~513)

 

❖-해제

심약이 편찬한

『송서(宋書)·은일전(隱逸傳)』에 실려 있는 도연명의 전기이다.

처음으로 정사(正史)에 도연명의 전기를 저록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도연명의 전기는 이 외에도 당 방현령(房玄齡,579~648)이 편찬한 『진서(晉書))』와

당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남사』에도 전하는데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송서(宋書)』이하,『진서(晉書))』,『남사』의 『도잠전』은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1974년 초판을 저본으로 하였다.

 

陶潛字淵明, 도잠은 자가 연명인데,

或云,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淵明字元亮. “연명은 자가 원량이다.”라고 하였다.

潯陽柴桑人也, 심양 시상 사람으로,

曾祖侃, 증조부 도간은

晉大司馬. 진나라 대사마를 지냈다.

潛少有高趣, 도잠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뜻이 있었으며,

嘗著五柳先生傳, 일찍이 「오류선생전」을 지어

以自況曰. 자신을 비유하였다.

其自序如此, 그가 직접 서술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時人謂之實錄.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親老家貧, 모친은 늙고 집안은 가난하여,

起爲州祭酒, 나서서 강주(江州)의 좨주가 되었으나

不堪吏職, 관직을 감당하지 못해

少日自解歸. 며칠 안 되어 스스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州召主簿, 강주에서 주부로 불렀으나

不就, 나아가지 않고

躬耕自資, 몸소 농사를 지어 자급하다가

遂抱嬴疾. 드디어 쇠약해져 병을 갖게 되었다.

復爲鎭軍建威參軍. 다시 진군참군과 건위참군이 되었다.

謂親朋曰, 친구들에게 이르기를,

聊欲絃歌, “그런대로 현령이나 하면서

以爲三徑之資, 은거의 비용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可乎? 그럴 수 있을까?”라고 하자

執事者聞之, 담당자가 듣고

以爲彭澤令. 팽택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公田, 관청의 전답에,

悉令吏種秫稻, 아전들에게 명하여 모두 차조를 심게 하자

妻子固請種秔, 아내가 메벼를 심을 것을 간청하였다.

乃使二頃五十畝種秫, 결국 2경 50무에는 차조를 심고

五十畝種秔, 50무에 메벼를 심게 하였다.

郡遣督郵至, 군청에서 독우를 파견하여 이르자,

縣吏白應束帶見之, 현의 아전이 관디를 매고 그를 뵈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潛嘆曰, 도잠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我不能爲五斗米, “내가 다섯 말의 녹봉을 위하여

折腰向鄕里小人. 허리를 굽히고 시골의 소인배를 맞이할 수 없다.”라 하고

即日解印綬去職. 그날로 인끈을 풀고 관직에서 떠났다.

賦歸去來, 「귀거래사」를 지었는데,

其詞曰. 그 가사가 다음과 같다.

義熙末徵著作佐郞, 의희 말기에 저작좌랑으로 초빙되었으나

不就. 나아가지 않았다.

江州刺史王弘欲識之, 강주자사 왕홍(王弘)이 그와 알고 지내고자 하였으나

不能致也. 불러 올 수 없었다.

潛嘗往廬山, 도잠이 한번은 여산을 가는데

弘令潛故人龐通之齎酒具於半道栗里, 왕홍이 도잠의 친구인

방통지를 시켜 중간 지점인 율리에 술마실 채비를 가지고 가서

要之. 그를 기다리게 하였다.

潛有脚疾, 도잠은 다리에 병이 있어

使一門生二兒輿籃輿, 같은 문화생인 두 아이에게 남여를 매게 하였는데,

旣至, (방통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던 곳에 도연명이)이른 뒤에

欣然便其飮酌. 기쁘게 곧바로 함께 술잔을 주고받았다.

俄頃宏至, 잠시 후에 왕홍이 도착하였고

亦無忤也. 역시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先是, 이보다 앞서

顔延之爲劉柳後軍功曹, 안연지가 유유희 후군공조가 되어

在潯陽, 심양에 있으면서

與潛情款. 도잠과 사이가 좋았다.

後爲始安郡, 뒤에 시안군을 다스리게 되어

經過, 지나는 길에 들러서

日日造潛, 매일 도잠을 찾아갔고

每往必酣飮致醉. 찾아갈 때마다 반드시 거나하게 마셔 취하곤 하였다.

臨去, 떠나면서

留二萬錢與潛, 2만 전을 도연명에게 주고 가자

潛悉送酒家, 도연명은 모두 술집에 보내고

稍就取酒. 이따금씩 가서 술을 받아왔다.

嘗九月九日無酒, 한번은 9월 9일[중양절(重陽節)]에 술이 없어

出宅邊菊叢中坐久, 집 가에 있는 국화꽃 가운데에 나가서 한참 동안 앉아 있었는데,

値弘送酒至, 마침 왕홍이 술을 보내어 이르자

即使就酌, 곧바로 가져다 마셨고

醉而後歸. 취하여 귀가하였다.

潛不解音聲. 도잠은 음률을 잘 알지 못했지만

而蓄素琴一張. 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無絃. 줄이 없었다.

每有酒適, 매번 술이 거나해지면

輒撫弄以寄其意. 번번이 그것을 어루만지며 자시의 뜻을 기탁하였다.

貴賤造之者, 귀한이나 천한 이를 막론하고 그를 찾아가면

有酒輒設, 술을 마련하여 번번이 차려냈는데

潛若先醉, 도연명은 만약 먼저 취하면

便語客, 바로 손님에게 말하기를

我醉欲眠卿可去, “내가 취해서 자고 싶으나 그대는 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으니

其眞率如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郡將候潛, 군청에서 사람을 보내 도잠에게 안부하게 하였는데,

値其酒熟, 마침 술이 익었을 때가 되자

取頭上葛巾漉酒, 머리위의 갈건을 벗어 술을 걸렸고,

畢, 끝나자

還復著之. 다시 그것을 썼다.

潛弱年薄宦, 도잠은 젊은 시절에 낮은 관직에 있었지만

不潔去就之迹. 벼슬길에 나서는 발걸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自以曾祖晉世宰輔, 스스로 생각하기에, 증조부가 진대(晉代)의 재상이었기 때문에

恥復屈身後代, 후대에 다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自高祖王業漸隆, 남조 송 고조[유유(劉裕)]의, 왕위에 오르는 대업이 점차 무르익자

不復肯任. 더 이상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所著文章, 짓는 글들은

皆題其年月, 모두 그때의 연도와 달을 썼는데

義熙以前, 의희 이전은

則書晉氏年號, 진대의 연호를 썼고,

自永初以來, 영초 이후로는

唯云甲子而已. 오직 갑자를 썼을 뿐이었다.

與子書以言其志, 아들들에게 글을 써서 자신의 뜻을 말하고

幷爲訓戒曰. 아울러 훈계하였으니, 내용이 다음과 같다.

又爲命子詩, 또「명자」라는 시를 지어

以貽之曰. 그들에게 주었으니, 내용이 다음과 같다.

潛元嘉四年卒, 도잠은 원가4년(427)에 죽었는데,

時年六十三. 당시 나이가 63세였다.

출처: 도연명 산문집 김창환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