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南史)·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당(唐) 이연수(李延壽·생졸년미상)
❖-해제
당 이연수가 편찬한 『남사(南史)』에 실려 있는 도연명의 전기이다.
심약이 편찬한 『송서』의 「도잠전」,소통이 기술한「도연명전」
당 방현령이 편찬한「진서」의「도잠전」과 내용이 대동소이하지만
간간이 새로운 내용이나 일화가 추가되어 있다.
앞 전기들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여겨 전문을 역주하였다.
陶潛字淵明, 도잠은 자가 연명인데,
或云,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字深明, “자가 심명이고
名元亮. 이름이 원량이다.”라고 하였다.
尋陽柴桑人, 심양 시상 사람으로,
晉大司馬侃之曾孫也. 진나라 대사마 도간의 증손이다.
少有高趣, 젊어서부터 고상한 뜻이 있었는데
宅邊有五柳樹. 집 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다.
故常著五柳先生傳云. 그래서 일찍이「오류선생전」을 지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其自序如此,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蓋以自況,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時人謂之實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親老家貧, 모친은 늙고 집안은 가난하여,
起爲州祭酒, 나서서 강주(江州)의 좨주가 되었으나
不堪吏職, 관직을 감당하지 못해
少日自解而歸. 며칠 안 되어 스스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州召主簿, 강주에서 주부로 불렀으나
不就, 나아가지 않고
躬耕自資, 몸소 농사를 지어 자급하다가
遂抱羸疾. 드디어 쇠약해져 병을 갖게 되었다.
江州刺史檀道濟往候之, 강주자사 단도제가 찾아갔는데
偃臥瘠餒有日矣. 여위고 굶주린 채 누워 있었던 것이 여러 날이 되었다.
道濟謂曰, 단도제가 말하기를,
夫賢者處世, “현자가 처세하는 것은
天下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없으면 은거하고
有道則至. 도가 있으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今子生文明之世, 지금 그대는 교화가 잘 이루어진 세상에 살면서
奈何自苦如此? 어찌하여 이처럼 스스로 고생을 하시는지요?”라고 하자
對曰, 대답하기를
潛也何敢望賢. “제가 어찌 감히 현자를 기대하겠습니까.
志不及也. 뜻이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道濟饋以梁肉, 단도제가 곡식과 고기를 선물하였으나
麾而去之. 손을 내저어 물리쳤다.
後爲鎭軍建威參軍. 뒤에 진군참군과 건위참군이 되었다.
謂親朋曰, 친구들에게 이르기를
聊欲絃歌, “그런대로 현령이나 하면서
以爲三徑之資, 은거의 비용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可乎? 그럴 수 있을까?”라고 하자
執事者聞之, 담당자가 듣고
以爲彭澤令. 팽택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不以家累自隨, 집안 식구들을 직접 데리고 가지 못하자
送一力給其子, 일꾼 한 명을 아들에게 보내주며
書曰, 편지를 썼는데,
汝旦夕之費, “네가 아침저녁의 번거로운 일을
自給爲難. 직접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今遣此力, 지금 이 일꾼을 보내
助汝薪水之勞, 너의 나무하고 물 긷는 노고를 돕도록 하겠다.
此亦人子也, 이 사람 또한 남의 집 자식이니
可善遇之.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公田, 관청의 전답에,
悉令吏種秫稻, 아전들에게 명하여 모두 차조를 심게 하자
妻子固請種粳. 아내가 메벼를 심을 것을 간청하였다.
乃使二頃五十畝種秫, 이에 2경 50무에는 차조를 심고
五十畝種粳, 50무에 메벼를 심게 하였다.
郡遣督郵至, 군청에서 독우를 파견하여 이르자
縣吏白應束帶見之, 현의 아전이 관디를 매고 그를 뵈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潛嘆曰, 도잠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我不能爲五斗米, “나는 다섯 말의 녹봉을 위하여
折腰向鄕里小人, 허리를 굽히고 시골의 소인배를 맞이할 수 없다.”라 하고는
即日解印綬去職, 그날로 인끈을 풀고 관직에서 떠나
賦歸去來, 「귀거래혜사」를 지어,
以遂其志曰. 다음과 같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義熙末徵爲著作佐郞, 의희 말기에 저작좌랑으로 초빙되었으나
不就. 나아가지 않았다.
江州刺史王弘欲識之, 강주자사 왕홍이 그와 알고 지내고자 하였으나
不能致也. 불러올 수 없었다.
潛嘗往廬山, 도잠이 한번은 여산을 가는데
弘令潛故人龐通之, 왕홍이 도잠의 친구인 방통지를 시켜
齎酒具於半道栗里, 길의 중간쯤 지점인 율리에 술 마실 채비를 가지고 가서
要之. 그를 기다리게 하였다.
潛有脚疾, 도잠은 다리에 병이 있어
使一門生二兒擧籃轝, 같은 문하생인 두 아이에게 남녀를 메게 하였는데,
及至, (방통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던 곳에 도연명이)이르자
欣然便共飮酌. 기뻐하면서 곧바로 함께 술잔을 주고받았다.
俄頃弘至, 잠시 후에 왕홍이 도착하였고
亦無忤也. 역시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先是, 이보다 앞서
顔延之爲劉柳後軍功曹, 안연지가 유유의 후군공조가 되어
在尋陽, 심양에 있으면서
與潛情款. 도잠과 사이가 좋았다.
後爲始安郡, 뒤에 시안군을 다스리게 되어
經過潛, 지나는 길에 도잠을 방문하였고
每往必酣飮致醉. 찾아갈 때마다 반드시 거나하게 마셔 취하곤 하였다.
弘欲要延之一坐, 왕홍은 안연지를 초대하여 자리를 함께하고 싶었지만
彌日不得. 종일토록 만나지 못하였다.
延之臨去, 안연지가 떠나면서
留二萬錢與潛, 2만전을 도잠에게 주고 가자
潛悉送酒家, 도잠은 모두 술집에 보내고
稍就取酒. 이따금씩 가서 술을 받아 왔다.
嘗九月九日無酒, 한번은 9월 9일[중양절(重陽節)]에 술이 없어
出宅邊菊叢中坐久之, 집 가에 있는 국화꽃 가운데에 나가서 한참 동안 앉아 있었는데,
逢弘送酒至, 마침 왕홍이 술을 보내어 이르자
即便就酌, 곧바로 가져다 마셨고
醉而後歸. 취한 뒤에 귀가하였다.
潛不解音聲, 도잠은 음률을 잘 알지 못했지만
而畜素琴一張. 소박한 거문고 한 틀을 가지고 있었다.
每有酒適, 매번 술이 거나해지면
輒撫弄以寄其意. 번번이 그것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뜻을 기탁하였다.
貴賤造之者, 귀한이나 천한 이를 막론하고 그를 찾아가면
有酒輒設, 술을 마련하여 번번이 차려냈는데
潛若先醉, 도잠은 만약 먼저 취하면
便語客, 바로 손님에게 말하기를,
我醉欲眠卿可去. “내가 취해서 자고 싶으니 그대는 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으니
其眞率如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郡將候潛, 군청에서 사람을 보내 도잠에게 안부하게 하였는데,
逢其酒熟, 마침 술이 익었을 때가 되자
取頭上葛巾漉酒, 머리 위의 갈건을 벗어 술을 걸렀고,
畢, 끝나자
還復著之. 다시 그것을 썼다.
潛弱年薄宦, 도잠은 젊은 시절에 낮은 관직에 있었지만
不潔去就之迹, 벼슬길에 나서는 발걸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自以曾祖晉世宰輔, 스스로 생각하기를, 증조부가 진대(진대)의, 재상이었기 때문에
恥復屈身後代, 후대에 다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自宋武帝王業漸隆, 남조 송 고조[유유(劉裕)]의, 왕위에 오르는 대업이 점차 무르익자
不復肯任. 더 이상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所著文章, 지은 글들은
皆題其年月, 모두 그때의 연도와 달을 썼는데,
義熙以前, 의희 이전은
明書晉氏年號, 진대의 연호를 밝혀서 썼고,
自永初以來, 영초 이후로는
唯云甲子而已. 오직 갑자를 썼을 뿐이었다.
與子書以言其志, 아들들에게 글을 써서 자신의 뜻을 말하고
幷爲訓戒曰. 아울러 훈계하였으니, 내용이 다음과 같다.
又爲命子詩以貽之. 또 「명자」라는 시를 지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元嘉四年, 원가 4년(427)에
將復徵命, 장차 다시 조정에서 초빙하려고 하였는데
會卒. 마침 죽었다.
世號靖節先生. 세간에서 ‘정절선생’이라고 시호를 지었다.
其妻隻氏, 그의 아내 적씨도
志趣亦同, 뜻과 취향이 또한 같아서
能安苦節, 부지런히 애쓰는 것을 편안히 여길 수 있어서
夫耕於前, 남편이 앞에서 밭을 갈면
妻鋤於後云. 아내는 뒤에서 호미질을 하였다.
출처: 도연명 산문집 김창환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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