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전(陶淵明傳)」
남조 양(梁) 소통(蕭統·501~531)
❖-해제
남조 양(梁) 심약(沈約, 441~513)이 편찬한 송서
『宋書·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내용이 심약의 기술과 대동소이하지만, 소통이 처음으로
『도연명집(陶淵明集)』을 편찬하고 올린 전기라는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陶淵明字元亮, 도연명은 자가 원량인데,
或云,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潛字淵明. “도잠은 자가 연명이다.”라고 하였다.
潯陽柴桑人也, 심양 시상 사람으로,
曾祖侃, 증조부 도간은
晉大司馬. 진나라 대사마를 지냈다.
淵明少有高趣, 도연명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뜻이 있었으며,
博學善屬文. 박학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穎脫不群, 세속에서 벗어나 무리와 어울리지 않은 채
任眞自得. 진솔함에 맡겨 스스로 편안하였다.
嘗著五柳先生傳, 일찍이 「오류선생전」을 지어
以自況, 자신을 비유하였는데,
時人謂之實錄.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親老家貧, 모친은 늙고 집안은 가난하여,
起爲州祭酒, 나서서 강주(江州)의 좨주가 되었으나
不堪吏職, 관직을 감당하지 못해
少日自解歸. 며칠 안 되어 스스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州召主簿, 강주에서 주부로 불렀으나
遂抱嬴疾. 드디어 쇠약해져 병을 갖게 되었다.
江州刺史檀道濟往候之, 강주자사 단도제가 찾아갔는데
偃臥瘠餒有日矣. 여위고 굶주린 채 누워 있었던 것이 여러 날이 되었다.
道濟謂曰, 단도제가 이르기를
賢者處世, “현자가 처세하는 것은
天下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없으며 은거하고
有道則至. 도가 있으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今子生文明之世, 지금 그대는 교화가 이루어진 세상에 살면서
奈何自苦如此? 어찌하여 이처럼 스스로 고생을 하시는지요?”
對曰, 대답하기를,
潛也何敢望賢. “제가 어찌 감히 현자를 기대하겠습니까.
志不及也. 뜻이 미치지 못합니다.”
道濟饋以梁肉, 단도제가 곡식과 고기를 선물하였으나
麾而去之. 손을 내저어 물리쳤다.
後爲鎭軍建威參軍. 뒤에 진군참군과 건위참군이 되었다.
謂親朋曰, 친구들에게 이르기를,
聊欲絃歌, “그런대로 현령이나 하면서
以爲三徑之資, 은거의 비용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可乎? 그럴 수 있을까?”라고 하자
執事者聞之, 담당자가 듣고
以爲彭澤令. 팽택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不以家累自隨, 집안 식구들을 직접 데리고 가지 못하자
送一力給其子, 일꾼 한 명을 아들에게 보내주며
書日, 편지를 썼는데,
汝旦夕之費, “네가 아침저녁의 번거로운 일을
自給爲難. 직접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今遣此力, 지금 이 일꾼을 보내
助汝薪水之勞. 나의 나무하고 물 긷는 노고를 돕도록 하겠다.
此亦人子也, 이 사람 또한 남의 집 자식이니
可善遇之.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公田, 관청의 전답에,
悉令吏種秫曰, 아전들에게 명하여 모두 차조를 심게 하면서 이르기를,
吾常得醉于酒, “내가 늘 술에 취할 수만 있다면
足矣. 만족하겠다.”라고 하였다.
妻子固請種秔, 아내가 메벼를 심을 것을 간청하자
歲終會郡遣督郵至, 연말에 마침 군청에서 독우를 파견하여 이르자
縣吏請曰, 현의 아전이 청하기를
應束帶見之. “관띠를 매고 그를 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淵明歎曰, 도연명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我豈能爲五斗米, “내가 어찌 다섯 말의 녹봉을 위하여
折腰向鄕里小兒. 허리를 굽히고 시골의 소인배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卽日解綬去職, 그날로 인끈을 풀고 관직에서 떠나
賦歸去來. 「귀거래사」를 지었다.
徵著作郞, 저작랑으로 초빙되었으나
不就. 나아가지 않았다.
江州刺史王宏欲識之, 강주자사 왕홍(王弘)이 그와 알고 지내고자 하였으나
不能致也. 불러올 수 없었다.
淵明嘗往廬山, 도연명이 한번은 여산을 가는데
宏命淵明故人龎通之, 왕홍이 도연명의 친구인 방통지를 시켜
齎酒具於半道栗里之間. 중간인 율리 즈음에 술 마실 채비를 가지고 가서
要之. 그를 기다리게 하였다.
淵明有脚疾, 도연명은 다리에 병이 있어
使一門生二兒舁籃輿, 같은 문화생인 두 아이에게 남녀를 매게 하였는데,
旣至, (방통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던 곳에 도연명이)이른 뒤에
欣然便其飮酌. 기쁘게 곧바로 함께 술잔을 주고받았다.
俄頃宏至, 잠시 후에 왕홍이 도착하였고
亦無迕也. 역시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先是, 이보다 앞서
顔延之爲劉柳後軍功曹, 안연지가 유유희 후군공조가 되어
在潯陽, 심양에 있으면서
與淵明情款. 도연명과 사이가 좋았다.
後爲始安郡, 뒤에 시안군을 다스리게 되어
經過潯陽, 지나는 길에 심양에 들렀고
日造淵明飮焉, 매일 도연명을 찾아가 술을 마셨는데
每往, 갈 때마자
必酣飮致醉. 반드시 거나하게 마셔 취하곤 하였다.
宏欲要延之坐, 왕홍은 안연지를 초대하여 자리를 갖고자 하였으나
彌日不得. 종일토록 만나지 못하였다.
延之臨去, 안연지가 떠나면서
留二萬錢與淵明, 2만 전을 도연명에게 주고 가자
淵明悉遣送酒家, 도연명은 모두 술집에 보내고
稍就取酒. 이따금씩 가서 술을 받아왔다.
嘗九月九日, 한번은 9월 9일[중양절(重陽節)]에
出宅邊菊叢中坐久之, 집 가에 있는 국화꽃 가운데에 나가서 한참 동안 앉아
滿手把菊, 손에 가득 국화를 쥐고 있었는데
忽値宏送酒至, 홀연 왕홍이 술을 보내어 이르자
卽使就酌, 곧바로 가져다 마셨고
醉而歸. 취하여 귀가하였다.
淵明不解音律. 도연명은 음률을 잘 알지 못했지만
而蓄無絃琴一張. 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每酒適, 매번 술이 거나해지면
輒撫弄以寄其意. 번번이 그것을 어루만지며 자시의 뜻을 기탁하였다.
貴賤造之者, 귀한이나 천한 이를 막론하고 그를 찾아가면
有酒輒設, 술을 마련하여 번번이 차려냈는데
淵明若先醉, 도연명은 만약 먼저 취하면
便語客, 바로 손님에게 말하기를
我醉欲眠卿可去, “내가 취해서 자고 싶으나 그대는 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으니
其眞率如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郡將常候之, 군청에서 사람을 보내 일찍이 그에게 안부하게 하였는데,
値其釀熟, 마침 술이 익었을 때가 되자
取頭上葛巾漉酒, 머리위의 갈건을 벗어 술을 걸렸고,
漉畢, 다 거르자
還復著之. 다시 그것을 썼다.
時周續之入廬山, 당시에 주속지는 여산에 들어가
事釋惠遠, 승려 혜원을 섬겼고
彭城劉遺民亦遯迹匡山, 팽성의 유유민 역시 여산에 은둔해 있었으며
淵明又不應徵命, 연명도 조정의 초빙에 응하지 않자,
謂之潯陽三隱. 그들을 일러‘심양삼은’이라고 하였다.
後刺史檀韶苦請續之出州, 뒤에 자사 단소가 주속지에게 주(州)로 나올 것을 간청하자
與學士祖企謝景夷三人, 학사인 조기, 사경이와 더불어 세 사람이
共在城北講禮, 함께 성북에서 예를 강론하고
加以講校. 더욱이 교감까지 하였다.
所住公廨, 머무르던 공관이
近於馬隊, 말 시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是故淵明示其詩云, 도연명이 시를 써서 보이기를
周生述孔業, “주 선생이 공자의 학설을 전하자,
祖謝響然臻. 조기와 사경이가 메아리 호응하듯 이르렀다지.
馬隊非講肆, 말 시장은 강론할 곳이 아닌데도,
校書亦已勤. 책의 교감에도 너무나 부지런하시다지.”라고 하였다.
其妻翟氏亦能安勤苦, 그의 아내 적씨 부지런히 애쓰는 것에 편안할 수 있어서
與其同志. 그와 뜻을 같이 하였다.
自以曾祖晉世宰輔, 스스로 생각하기에, 증조부가 진대(晉代)의 재상이었기 때문에
恥復屈身後代, 후대에 다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自宋高祖王業漸隆, 남조 송 고조[유유(劉裕)]의, 왕위에 오르는 대업이 점차 무르익자
不復肯任. 더 이상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元嘉四年, 원가4년(427)에
將復徵命, 장차 다시 조정에서 초빙하려고 하였는데
會卒. 마침 죽었다.
時年六十三. 당시 나이가 63세였다.
世號靖節先生. 세간에서‘정절선생(정절선생)’이라고 시호를 지었다.
출처: 도연명 산문집 김창환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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