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字 千 金
(한 일, 글자 자, 일천 천, 쇠 금)
한 글자에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국 시대 말엽, 제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 여불위(呂不韋)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
그는 막대한 사재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荀子)가 수만어(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불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
'여씨춘추(呂氏春秋)'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 '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