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談
(맑을 청, 말씀 담)
명예와 이권을 떠난 얘기.
노장 철학을 연구하던 거사들의 얘기.
삼국시대 위나라 말기 사마씨 일파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황제의
자리를 넘보자 이에 불만을 품은 혜강, 완적, 산도, 향수(向
秀), 완함(阮咸), 왕융(王戎), 유영(劉怜) 등이 당대 명사들과
함께 죽림에서 청담(淸談)을 나누며 소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
은 이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다.
위진(魏晋) 시대의 청담은 노자, 장자의 철학론이 중심을 이루었
고, 때로는 허무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하였다. 이것은 정치권력
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색채가 농후하였다.
이들 죽림칠현은 나중에 사마씨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혜강과 같은 고집쟁이는 의연히 사마씨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혜강도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
이다. 혜강의 자는 숙야(叔夜)이고 초군(안휘성 숙현) 출신으로
위나라 말기 명사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문학을 잘
하고 회화에 능하였으며 특히 거문고를 좋아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사마씨는 완적과 혜강을
자파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가지 회유책을 썼다. 완적
은 술과 익살스런 말로 그때 그때의 위기를 무난히 모면하였으
나,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 일파와 직설적으로 대결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다.
사마씨 일파들은 혜강의 죄를 날조하여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갔다.
혜강은 형장에서 한나라의 간신을 척살한 섭정의 행동에 깊은 감
동을 느낌과 동시에 간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술책
에 빠져든 자신의 무력함에 회한과 통한의 분노를 삼켰다.
혜강은 그 자리에서 거문고를 빌어 '광릉산' 한 곡조를 탄주하였
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거문고, 그것은 혜강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갈고 닦아온 그 곡조를
그 거문고를 실어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그의 비장한
곡이 흡사 장송곡처럼 온 형장 안을 뒤덮어 울려 퍼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혜강은 거문고를 손에서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길이 탄식하였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광릉산아, 너는
이 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오직 그것이 원통할 뿐
이로다!"
이렇게 해서 혜강은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광릉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곡조는 금사
(琴師)들 사이에서 계속 탄주되었으며, 9백여 년 후 뜻 있는 음
악가에의 <신기비보(神奇秘譜)>안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곡은 전하고 있지만, 혜강처럼 온 생애의 정열을 담은 신기에 가
까운 '광릉산'을 탈 줄 아는 사람은 그 후 아무도 없는 것이 아
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