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의 장사(長史)를 지낸 돌아가신 맹부군(孟府君)전기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晋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
❖-해제
이 글은 도연명이 돌아가신 외조부 맹가(孟嘉)를 위해지은 것이다.
맹가는 오랫동안 환온(桓溫)의 막료를 지내다가 마지막으로 장사(長史)를 지냈다.
도연명은 그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면서 먼저 집안의 가계를 제시하고 이어
인품을 칭송하였다.
서술 내용은 그가 이룬 업적보다는 명사로서의 풍모 등에 관한
일화를 위주로 기록하고 있다.
도연명의 모친은 맹가의 넷째 딸 이었다.
❖- 역주
君諱嘉, 부군은 휘자가 가(嘉)이고
字萬年, 자가 만년(萬年)으로,
江夏鄂人也. 강하 악(鄂) 출신이다.
曾祖父宗以孝行稱, 그의 증조부인 맹종(孟宗)은 효행으로 칭송받았으며,
仕吳司空. 오(吳)나라에서 사공을 지냈다.
祖父揖, 그의 조부인 맹읍(孟揖)은
元康中爲廬陵太守. 원강 연간에 여릉 태수를 지냈다.
宗葬武昌新陽縣, 맹종이 무창 신양현에 안장되면서
子孫家焉, 자손이 거기에 정착하게 되어
遂爲縣人也. 마침내 그 고을 사람이 되었다.
君少失父, 부군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奉母二弟居. 모친을 봉양하면서 두 동생과 살았다.
娶大司馬長沙桓公陶侃第十女, 대사마였던 장사(長沙)의 환공 도간의 열째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閨門孝友,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人無能間, 남들이 흠을 잡을 수 없었으니
鄕閭稱之. 고을에서 그녀를 칭찬했다.
沖黙有遠量, (부군은)온화하고 과묵하였으며 원대한 도량을 지녀,
弱冠儔類咸敬之. 약관에도 동료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
同郡郭遜, 같은 고을의 곽손이
以淸操知名, 깨끗한 지조로 이름이 알려져
時在君右, 당시에 부군의 위에 있었는데
常歎君溫雅平曠, 항상 부군의 온화· 고상함과 공평·관대함을 감탄하면서,
遜從弟立, 곽손의 사촌동생인 곽입(郭立)도
亦有才志, 역시 재능과 의지가 있어
與君同時齊譽, 부군과 같은 시기에 명성을 나란히 했으나,
每推服焉. 매번 그를 받들며 따랐다.
由是名冠州里. 이로 인해 이름이 고을에 으뜸이었고
聲流京邑. 소문은 도성까지 퍼졌다.
太尉穎川庾亮, 태위인 영천(穎川)의 유양은
以帝舅民望. 황제의 외숙부로 백성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受分陝之重, 지방관의 중책을 맡아
鎭武昌, 무창을 다스리며,
幷領江州, 강주를 함께 관할하였는데,
辟君部廬陵從事. 부군을 불러 여릉종사를 맡도록 하였다.
下郡還, (임기를 마치고) 고을로 돌아갈 때
亮引見, 유양이 접견하고
問風俗得失. 풍속의 잘잘못에 대해 물었다.
對曰, 대답하기를,
嘉不知, “저는 모르겠으니,
還傳當問從吏. 객사에 돌아가 속관에게 물어보겠습니다.”라고 하자
亮以麈尾掩口而笑. 유양이 주미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諸從事旣去, 여러 종사들이 간 뒤에
喚弟翼語之曰, 동생 유익(庾翼)을 불러 말하기를,
孟嘉故是盛德人也. ‘맹가는 본디 덕이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君旣辭出外, 부군이 작별한 뒤에 밖으로 나가,
自除吏名, 자신을 관리의 명단에서 지우고,
便步歸家. 곧장 걸어서 귀가하니.
母在堂,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兄弟共相歡樂, 형제가 함께 즐거워하여,
怡怡如也. 화목한 모습이었다.
旬有餘日, 십여 일 후에,
更版爲勸學從事. 다시 권학종사에 임명되었다.
時亮崇修學校, 당시 유양은 학교를 세우고
高選儒官, 높은 기준으로 유학자 관리를 뽑았는데,
以君望實, 부군의 명망과 실력 때문에
故應尙德之擧. 덕을 숭상하는 선발에 부합했던 것이다.
太傳河南褚褒, 태부(太傳)인 하남의 저포는
簡穆有器識. 소탈하고 차분하며 기량과 식견이 있었다.
時爲豫章太守, 당시에 예장태수였는데
出朝宗亮. (예장을)나와 유양을 찾아뵈었다.
正旦大會, 정월 초하루의 대규모 모임에
州府人士, 고을 관아의 인사들이
率多時彦, 대부분 당시의 유명한 선비들이라서
君在坐次甚遠. 부군은 좌석의 차례에서 매우 멀었다.
褒問亮, 저포가 유양에게 묻기를,
江州有孟嘉, “강주에 맹가가 있다는데,
其人何在? 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자
亮云, 유량이 말하기를
在坐, “자리에 있으니
卿但自覓. 그대가 바로 직접 찾아보시지요.”라고 하였다.
褒歷觀, 저포가 둘러보다가
遂指君謂亮曰, 마침내 부군을 가리키며 유양에게 말하기를,
將無是耶? “아마 이 사람이 아닐까요?”라고 하자
亮欣然而笑. 유양이 좋아하며 웃었다.
喜褒之得君, 저포가 부군을 알아본 것을 기뻐하고
奇君爲褒之所得. 부군이 저포에게 식별된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乃益器焉, 이에 더욱 그를 중시하여,
擧秀才. 수재로 등용 하였다.
又爲安西將軍庾翼府功曹, 또 안서장군인 유익의 관아에서 공조를 지냈으며,
再爲江州別駕, 다시 강주별가가 되었고
巴邱令, 파구령을 지냈으며,
征西大將軍譙國桓溫參軍. 정서대장군인 초국 환온의 참군을 지냈다.
君色和而正, 부군은 안색이 온화하고 단정하여,
溫甚重之. 환온이 그를 매우 중시하였다.
九月九日, 9월9일(중양절)에
溫遊龍山, 환온이 용산에 나들이를 나갔는데
參佐畢集, 참모들이 모두 모이고,
四弟二甥咸在坐. 네 동생과 두 생질이 다 참석하였다.
時佐吏並著戎服, 당시에 참모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有風吹君帽墮落. 바람이 불어 부군의 모자가 떨어졌다.
溫目左右及賓客勿言, 환온은 측근들과 손님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눈짓하고,
以觀其擧止. 그의 행동을 살폈다.
君初不自覺, 부군은 처음부터 알아채지 못하였고
艮久如厠. 한참 뒤에 화장실에 가자.
溫命取以還之. 환온이 그것을 가져왔다가 돌려주도록 명했다.
廷尉太原孫盛爲諮議參軍, 정위인 태원의 손성이 자의참군으로 있으면서
時在坐, 당시 자리에 있었는데,
溫命紙筆, 환온이 지필을 가져오게 하여
令嘲之. 그를 놀리도록 했다.
文成示溫, 글이 완성되어 환온에게 보이니,
溫以著坐處. 환온은 그가 앉았던 곳에 그것을 두었다.
君歸, 부군이 돌아와,
見嘲笑, 놀린 내용을 보고는
而請筆作答. 붓을 청해 답을 작성하였다.
了不容思, 전혀 생각할 틈도 없었는데
文辭超卓, 문사가 뛰어나자
四座歡之.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감탄하였다.
奉使京師, 명을 받들어 도성에 심부름 갔을 때
除尙書刪定郞, 상서성의 산정랑을 제수 받았으나
不拜. 받들지 않았다.
孝宗穆皇帝聞其名, 효종목황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賜見東堂, 동당에서 만날 기회를 하사하였는데
君辭以脚疾不任拜起, 부군이 다리 병 때문에 절하고 일어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자
詔使人扶入. 조서를 내려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들어오도록 하였다.
君嘗爲刺史謝永別駕, 부군은 일찍이 자사 사영의 별가를 지냈는데,
永會稽人. 사영은 회계 사람이었다.
喪亡, 그가 죽자
君求赴義, 부군이 가서 조문하려고 나섰는데
路由永興. 길이 영흥을 경유하였다.
高陽許詢有雋才, 고양의 허순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辭榮不仕, 영화를 사양하여 벼슬하지 않고
每縱心獨往, 항상 마음 내키는 대로 홀로 다녔는데,
客居縣界. (영흥현의) 경내에서 객거 하였다.
嘗乘船近行, 일찍이 배를 타고 부근을 가다가
適逢君過. 마침 지나는 부군과 만났다.
歎曰, 탄식하며 말하기를,
都邑美士, “도읍의 훌륭한 선비는
吾盡識之, 내가 모두 아는데,
獨不識此人. 오직 이 사람만은 모르겠구나.
唯聞中州有孟嘉者, 중주에 맹가라는 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將非是乎? 아마 이 사람이 아닐까?
然亦何由來此? 그런데 또한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왔는가?”라 하고
使問君之從者, 사람을 시켜 부군의 하인에게 물으니
君謂其使曰, 부군이 그 심부름꾼에게 말하기를
本心相過, ‘진심으로 찾아뵙고자 하나,
今先赴義, 지금은 먼저 가서 조문하고
尋還就君. 곧 돌아오면서 그분을 찾아뵙겠소.”라고 하였다.
及歸, 귀로에 나서
遂止信宿. 마침내 그곳에 이르러 이틀 밤을 지냈다.
雅相知得, 고상하게 서로를 알게 되니,
有若舊交. 마치 오래 사귄 친구와 같았다.
還至, 돌아와서,
轉從事中郞, 종사중랑으로 전보되었다가,
俄遷長史. 곧바로 장사(長史)로 옮겼다.
在朝隤然, 조정에서는 유순하였고,
仗正順而已. 정도와 순리에 의지할 뿐이었다.
門無雜賓, 문에는 행실이 비루한 손님이 드나들지 않았고
嘗會神情獨得, 일찍이 마음에 홀로 득의함을 만나면,
便超然命駕, 바로 초연하게 가마를 준비시켜
逕之龍山, 곧바로 용산으로 가서
顧景酣宴, 경치를 돌아보며 연회를 즐기다가
造夕乃歸.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溫從容謂君曰, 환온이 조용히 부군에게 이르기를,
人不可無勢. “사람은 위세가 없어서는 안 되오.
我乃能駕御卿. 내가 그래서 그대를 부릴 수 있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後以疾終於家, 뒤에 집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年五十一. 나이가 51세였다.
始自總髮, 처음 머리를 묶었을 때부터,
至於知命, 천명을 알 때(50세)까지
行不苟合, 행동은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고
言無夸矜, 말에는 자랑함이 없었으며,
未嘗有喜慍之容. 일찍이 기뻐하고 성내는 표정이 없었다.
好酣飮, 술마시기를 좋아 했지만,
逾多不亂, 지나치게 많이 마셔도 어지러워지지 않았고,
至於任懷得意, 심정에 맡긴 채 득의함에 이르면,
融然遠寄, 고상하게 멀리(마음을) 기탁하였으니
傍若無人.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하였다.
溫嘗問君, 환온이 일찍이 부군에게 묻기를,
酒有何好, “술에 무슨 좋은 점이 있어
而君嗜之? 그대는 그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자
君笑而答之. 부군이 웃으며 그에게 대답하였다.
明公但不得酒中趣爾 “명공께서는 다만 술 속의 흥취를 얻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又問, 또 묻기를,
聽妓, “기생의 노래를 들어보니
絲不如竹, 현악은 관악만 못하고
竹不如肉. 관악은 육성만 못하군요.”라고 하자
答曰, 대답하기를,
漸近自然. “점점 자연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仲散大夫桂陽羅含賦之曰, 중산대부인 계양의 나함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孟生善酣, “맹선생은 술을 잘 마셨으나
不愆其意. 그 뜻을 어그러뜨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光祿大夫南陽劉耽, 광록대부인 남양의 유탐이
昔與君同在溫府. 이전에 부군과 함께 환온의 막부에 있었다.
淵明從父大常夔嘗問耽, 나의 숙부인 태상 도기(陶夔)께서 일찍이 유탐에게 묻기를
君若在, “부군이 만약 살아 계시다면
當已作公不? 응당 벌써 삼공이 되셨겠지요?”라고 하자
答曰, 대답하기를,
此本是三司人. “그분은 본래 삼공이 될 분이었지요.”라고 하였다.
爲時所重如此. 당시 사람들에게 중시된 것이 이와 같았다.
淵明先親, 나의 돌아가신 모친은
君之第四女也. 부군의 넷째 따님이다.
凱風寒泉之思, 『시경·개풍』의 한천의 뜻이
實鍾厥心. 진실로 그 마음에 모였었다.
謹按採行事, 삼가 행하신 일을 조사하고 채집하여,
撰爲此傳. 이 전기를 지었다.
懼或乖謬, 혹 어긋나거나 잘못되어
有虧大雅君子之德, 높고 바른 군자의 덕을 훼손시킬까 염려되어,
所以戰戰兢兢,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若履深薄云爾. 깊은 연못을 대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한 심정이다.
贊曰. 찬미하는 글이다.
孔子稱, 공자가 일컫기를,
進德修業,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것은,
以及時也. 때에 맞추어 일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君淸蹈衡門, 부군이 청렴하게 형문을 밟자
則令聞孔昭, 아름다운 소문이 크게 빛났고,
振纓公朝. 조정에서 벼슬을 하자
則德音允集. 좋은 명성이 진실로 모여 들었다.
道悠運促, 천도는 멀고 명운은 짧아
不終遠業. 원대한 사업을 끝맺지 못하였다.
惜哉! 애석하다!
仁者必壽, 어진 이는 반드시 장수한다는데
豈斯言之謬乎. 아마도 이 말은 잘못 이었나보다.
출처: 도연명 산문집 김창환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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