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無後無 諸葛武候
(앞 전, 없을 무, 뒤 후, 없을 무, 모든 제, 칡 갈, 굳셀 무, 벼슬 후)
제갈공명은 오직 한 사람 뿐 이다.
제갈공명의 뛰어난 재주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제갈공명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고
개국공신으로서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진 유기(劉基)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던 중 옛 촉한의 땅이었던 촉 땅에 들어섰다
. 역사의 고적과 풍물들을 두루 구경하면서 날이 저물어
어떤 절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새벽 첫닭이 울 무렴이 되어 잠이 깨었는데 어디선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인가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인데 웬 닭의 울음소리일까?"
아침에 일어난 그는 궁금하여 주지에게 물었다.
"절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웬일이오?"
(당시 절은 사람, 짐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지는 웃음띤 얼굴로 대답하였다.
"이 절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 있사온데
그것이 바로 흙으로 빚어 만든 닭이옵니다. 그 닭은
옛 촉한 시절의 제갈공명이 이 절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고 가시다가 기념으로 빚어 놓은 닭이라 하옵는데
공교롭게도 새벽 닭 우는 시간이 되면 영락없이 울어
시간을 알려주곤 합니다."
'공명이 빚은 흙닭 속에 무엇을 넣었기에
그토록 신통하게 시간을 맞추어 우는걸까?'
그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 흙닭을 가져오라 하여 팽개쳐 깨뜨려 버렸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신기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직
글발이 적힌 조그마한 종이 두루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
그 두루마리에는 '유기는 내가 만든 흙닭을 깨뜨릴 것이다.
(劉基破土鷄)'라는 5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유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도 흙닭을 하나 빚어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유기가 빚은 흙닭은 울기는 울되 도대체
일정한 시간 없이 밤낮으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기는 제갈공명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자신을 우위에 놓고 있었다.
다음날 유기는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섰다.
제왕이나 위인들의 사당에 참배하려면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사당에 이르기 일정한 거리에서 모두 말에서
내리기도 되어 있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이 하마비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말을 타고
통과하려 하였다. 제갈공명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마비를 통과하려는 순간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말이 옴쭉달싹도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유기는 말에서 내려
종자로 하여금 말발굽 밑을 파보도록 하였다. 그곳에서도
유기를 훈계하는 듯한 내용의 글발이 나왔다.
"때를 만나면 천지도 함께 힘을 도와 주어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운수가 없으면 영웅의 계략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니라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在謨).'
유기는 머리를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
공명의 사당 참배를 마친 유기는 공명의 묘소로 발길을 옮겼다.
공명의 묘소가 시야에 들어오자 유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명의 묘소 뒤쪽에는 제왕지지(帝王之地: 제왕이 묻힐 만한
묏자리)가 될 만한 큰 명당 자리가 있는데도 공명은 그것을
모르고 보잘 것 없는 묏자리에 자신을 장사 지내게 하였으니
과연 공명은 유기 자신이 평소 생각한 대로 그렇게 훌륭한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기는 공명의 묘소에 올라 참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이상하게도 무릎이 땅바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일어서려고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굳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종자를 시켜 그곳을 파보니, "중신은 죽어서도 제왕의 곁을 떠나
지 않는 법이니라(忠臣不離君王側)." 라는 글발이 나왔다.
'내가 어찌 지리를 모르겠는가?
죽어서도 제왕을 모시기 위하여 이곳에 묻혔음을 알라.'
유기의 귀에는 제갈공명의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기는
감탄한 나머지 한숨을 몰아쉬며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候)."
유기는 마침내 제갈공명에에 머리를 숙이고 지난날의
그릇되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양의 무제는 남조 유일의 명군으로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역사를 읽다가 양의 무제 때에 이르면 숨이 트이고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할 짓인가 하고
회의를 느낄 정도로 잔학 행위가 이어지다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눈이 훤해지는 역사로 전개된다.
역사가들도 양무제에게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선 양문제는 정무에 열중하여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사경(四更: 새벽 2시)에 일어나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며
서류를 결재하고 공무를 처리하느라 손발이 터졌다고 한다.
무제는 노년기에 이르러 불심이 깊어져 황제보살이라 부르고
어쩌다 범인을 처형하게 되면 며칠 동안을 불쾌한 기분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 후 노년이 되면서 무제는 마음이 변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폭정을 하게 되었다.
황제보살의 정치는 그의 노년의 막바지에 이르러 548년에는
후경의 반란이 일어났다.
후경군은 대성을 포위한 지 130일 만에 마침내 대성을
함락시켰다.
후경은 대성에 입성하여 무제를 만났다. 이때 무제는 86세의
노령이었으나 역시 황제로서의 관록이 있었다
.
후경은 땀을 줄줄 흘리며 감히 무제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경은 어느 고을 사람이기에 감히 여기까지 왔는가?
그대의 처자는 아직도 북쪽에 있을테지?"
무제가 이렇게 물었건만 후경은 감히 대답을 못하였다
.
임약(임약)이라는 자가 후경의 곁에 있다가 대신 대답하였다.
"신 경의 처자는 모두 고씨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신 혼자만이 폐하에게 돌아왔습니다."
문답은 또 이어졌다.
"처음 강을 건널 땐 몇 명이었나?"
"1천명 정도였습니다."
후경은 이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말로 대답할 수 있었다.
"대성을 포위한 건 몇 명이었나?"
"10만 명이었습니다."
"온 나라 안의 백성 모두입니다."
후경의 대답이 이에 미치자 양무제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후 양무제는 유폐당하여 음식마저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울분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 그는 입맛이 써 견디지 못하여
꿀물을 요구하였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하자 두 차례나
'괘씸한 놈'이라고 목멘 소리를 내다가 얼마 후 죽었다.
양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조소라도 하듯,
"자업자득이로군.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하고 혼잣말로 뇌까렸다.
황제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고 죽어갔지만
이 싸움은 강남 백성들에게 크나큰 재난을 안겨주었다.